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저민 디즈레일리 (문단 편집) === 야당 지도자 시절 === 본업인 작가로 돌아가 1870년 소설 《로세어(Lothair)》를 발표했는데, 이게 또 [[베스트셀러]]가 된다(...)[* 문학성보다는 전직 총리가 소설을 써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듯 하다. 그러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정치인으로서의 유명세에 의존하는 작가라고 평가하기도 그런 것이, 문학성이 낮은 작가는 아니다. 원체 글솜씨가 준수하여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를 소설에 풀어내는 능력이 보통이 아닌데다 당대 작가로서의 영향력도 작지 않다.] 한편 정치에도 여전히 관심을 두어 글래드스턴 내각의 대외적 무관심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게 [[제국주의]]로 흐르던 민심에 제대로 적중했다. [[민족주의]]가 팽배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디즈레일리는 다시 대중의 지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가 1872년 왕세자(훗날의 [[에드워드 7세]])가 병을 앓아서 양 당 지도자가 문병안을 간 적이 있는데 이것을 바라보던 대중들이 디즈레일리에게는 엄청난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낸 반면 글래드스턴에게는 침묵스킬을 시전...] 그리고 1873년 다시 디즈레일리에게 기회가 온다. 그 기회는 역설적이게도 총리이던 시절 그의 발목을 잡은 아일랜드 내 가톨릭 대학 건립 문제였다. 글래드스턴이 야당 지도자 시절 주장하던 아일랜드 내 정교분리 시도는 막상 집권 후 거센 반발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더블린]]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 이에 디즈레일리는 아일랜드 내 가톨릭 교회 및 자유당 내부의 글래드스턴 반대 세력과 손을 잡고 이 법안을 부결시킨다. 글래드스턴은 사임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에게 수상 직을 제의했지만, 여전히 자유당이 제 1당인 상황에서 또다시 단명 총리가 되기는 싫었던 디즈레일리는 여왕의 제안을 사양한다. 그리고 다음해 있을 1874년 총선을 기다렸다. 1874년 2월에 열린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은 과반을 차지하는 낙승을 거두었고, 디즈레일리는 2번째 대영제국 총리직을 맡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